나는 목표의식이 없고, 멘탈이 약하다

아버지가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목표의식이 없다.”
이번에도 불합격했는데, 늦잠 자다가 아버지로부터 또 한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도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요.“당신은 멘탈이 약해.”
맨날 집에 있으면서 아이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냐면서 남편이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선생님, 제가 목표의식이 없나 봐요. 그리고 멘탈도 약한가 봐요. 그렇지요?

주요우울장애(우울증)나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건강 관련 주요질환들은 불안, 공포, 우울과 같은 정서/정신 증상들이 일차적으로 가장 앞서 표현되지만, 피로감, 무기력, 원인 모를 통증 혹은 회피행동(반응) 같은 신체/행동적인 증상도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오히려 이런 신체/행동 증상들을 호소하지 않는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과거보다 정신건강 관련 질환들이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 가정과 일터 그리고 사회에서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는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우울과 불안 증상에 대해서는 “나는 네가 우울한지 몰랐다.”, “그렇게 불안해하는 줄 내가 어떻게 알겠냐?”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무기력(피로감)과 회피 증상에 대해서는 “사지 멀쩡한 네가 왜 누워만 있느냐?”, “게으르다.”라고 지적받기에 십상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군가로부터 “너는 목표의식이 없는 것 같다.” 혹은 “너는 멘탈이 약한 것 같다.”라는 말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 분과 반대로 이런 말들을 다른 이들에게 해본 적이 있는 분, 이렇게 두 분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이야기로 풀어가 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아프게 되었을 때, 특히 그것이 정신적이라고 불리면 우리는 그 아픈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프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가 혹시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에 더 나아가서 “그와 나 모두 다 비슷한 환경과 상황을 겪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유독 이 사람만 아픈 것을 보니 아! 그렇구나, 이 사람의 멘탈이 약했구나, 맞다! 그 사람의 목표의식이 부족했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흐름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나의 이러한 판단이 틀림없겠구나 하는 확신마저 줍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멘탈을 더욱 강하게 하고 목표의식을 확실히 불어넣어 주면 곧 회복되어서 그 개인과 가정 그리고 우리 사회가 다시 잘 돌아갈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정신건강 관련 질환들을 앓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 이와 같은 인식을 가진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관점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이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접근은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갈등이 커지고 상처가 더욱 깊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접근법이 어떻게 단편적일 수 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와는 다른 관점들도 있다는 것을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분명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언젠가는 다 병들어 죽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이는 암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며, 누구는 치매에 걸리기도 합니다. 평생 얼마나 수많은 신체 및 정신 질환들이 우리를 괴롭히는지 더 예를 들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겪고 있는 혹은 앞으로 겪게 될 질병은 TV 오락프로그램에 나오는 ‘폭탄 돌리기’ 게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 옆에 사람이 걸렸다면, 내일은 나에게 폭탄이 넘어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병에 안 걸렸다고, 나는 괜찮다고 잘했다고 큰소리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네가 병에 걸렸다고, 너는 과거에 혹은 지금 뭔가 잘못했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보셨습니까? 나쁜 일은 늘 한꺼번에 생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사신 분들이라면 이런 원리가 우리 삶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쁜 일 중에 질병도 포함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질병들에는 정신건강의 어려움도 당연히 해당됩니다. 특히, 정신건강 관련 질환들은 스트레스 사건 혹은 불우한 일들을 겪은 후 많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스트레스 사건을 겪은 후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생겼다면, 그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판단과 지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과 배려를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가족 역동(family dynamic)’이라는 의학/심리 용어는 좀 생소하시지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과정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한 개인의 증상과 이것이 현재 환자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환자가 현재에 속해있는 혹은 과거에 성장해온 가족의 병력과 서로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환자의 유전, 기질, 가족의 구조와 가치관, 성격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 개인의 아픔을 마주하게 되면,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해석에 도달할 때가 있습니다. 현재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지금 고통 가운데 있지만, 과거부터 이분의 가정에는 이미 여러 상처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대(代)를 거치면서 쌓여온 상처가 이분을 통해 터져 나왔구나. 이분의 가족 중의 어느 구성원은 자기가 아픈 줄도 모르고 있거나 알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들이 제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가족을 대표해서 우리 병원을 찾아오신 분처럼 느껴집니다. 그 순간 이분은 저에게 있어서 여러 가족 구성원 중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회복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드리면, 이분은 100m 달리기경기에서 총소리를 듣고 가장 빨리 출발한 민첩한 선수와 같습니다. 다른 가족 구성원 중 누구는 출발선에서 아직 신발 끈도 못 묶고 있거나 심지어 경기장에도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관점에서는 비록 지금은 아프지만, 앞으로 잘 회복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의사의 눈은 아픈 것/병을 찾도록 훈련이 됐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그 앞에서는 순수한 건강함이라는 것이 좀처럼 존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저도 행복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이분께서 잘 치료를 받고 무난히 회복된다면, 이 과정에서 그분의 가족들도 이분을 통해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엄마의 우울증이 회복된다면, 아이들은 앞으로 엄마가 정성 들여 준비해주신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받아쓰기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의 공황장애가 회복된다면, 부자지간의 긴장에 끼여 새우 등 터져야 했던 어머니의 고민과 시름도 한결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남편이 아내의 수고를 격려하고 기쁜 마음으로 설거지를 돕고, 아버지는 자기 뜻을 아들에게 강요했던 것을 단념하고 아들을 기질과 관심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준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비로소 우리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정신건강의학 치료가 주는 ‘일석이조(一石二鳥)’효과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려보겠습니다. 몸과 마음이 근본적으로는 하나입니다. 결코, 둘로 나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책에서만 둘로 나뉘어 있을 뿐 현실에서는 온전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정신건강 관련 질환들은 신체 및 행동 증상을 반드시 동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앓고 있을 때, 누워있는 시간이 많고, 설사 일을 하더라도 잦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능률이 떨어지니 결국 일 마무리가 안 되어 타인에게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의 성품이나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급성기 증상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다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급성기 치료가 마무리될 때까지 시간의 여유를 갖고, 모두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조급해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많은 정신건강 관련 질환들은 삽화(episode)가 반복되는 성격/패턴이 있습니다. 그런데 첫 혹은 초기 발병 삽화 때, 해당 질병이 충분히 치료되어 완전한 관해(remission) 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찌꺼기 잔류증상을 가지고 우리 몸과 마음에 남아있게 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20~30대 청년 중에도 우울증을 겪는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의 일부는 이미 10대 중후반에 우울 증상을 최초로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10대 중후반에는 학업과 입시, 의학적 지식 부족, 부모님의 동의나 지원이 없이는 진료를 받을 수 없는 의료접근성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제 때에 충분히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경과에 따라 초기 삽화가 저절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지만, 당시에 경험했던 무기력, 좌절감, 회피행동 등은 몸으로 기억되어 잔류증상으로 계속해서 남아있게 됩니다. 그 당시에 겪었던 모든 증상이 적기에 충분히 치료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20~30대 내내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감과 무기력, 수면 과다 등을 호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아버님, 제 말씀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드님에게 목표의식이 없다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목표의식이 없는 것은 아드님 탓이 아니라 과거 앓았던 우울증의 잔류증상이 다 해소되지 못한 탓입니다. 안타깝게도 첫 발병 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난번 기회는 놓쳤지만, 이번 기회에는 더 꾸준하고 보다 섬세하게 치료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아드님은 아버지로부터 이런 말씀을 혹시 듣더라도 너무 기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는 우울증의 ‘우’ 도 모르는 분이십니다. 의학을 배우신 적이 없습니다. 밖에서는 호인으로 통하시는 분일지 몰라도, 정신의학 앞에서는 그냥 동네 아저씨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목표의식이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아드님이 목표의식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구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기에 두 발로 이곳을 직접 찾아오시지 않았을까요?

남편분, 제 이야기 한번 들어봐 주세요.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아내에게 무작정 멘탈이 약하다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결혼식 날 주례 선생님으로부터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씀 들었던 것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내가 아픈 것은 바로 내가 아픈 것입니다. 일터에서 수고했으니 이미 가장의 역할을 다했다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런 역기능적 가치관이 아내를 아프게 하는 데 한 몫을 차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분은 남편분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남편은 공황장애의 ‘공’도 모르는 분입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능력 있는 분일지 몰라도, 정신의학 앞에서는 아르바이트 학생 수준도 안 될 것입니다. 아내분께서 공황장애에 대해서는 남편분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므로 오히려 남편에게 잘 알려주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어려우시면 병원으로 함께 오세요. 제가 설명해드려 보겠습니다.

2021.10.06.
제주 슬하정신건강의학과의원
(www.seulha.com)
오동훈 올림